미리보기
나의 아버지, 빌리 그레이엄의 유산
"나의 아버지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목사였습니다." 20세기 복음주의의 위대한 영...
ISBN 978-89-315-7481-4
저자
발행일 2010-08-01
지은이 루스 그레이엄, 스테이시 매팅리 공동작업
옮긴이 전현주
개정판정보 2010년 8월 1일
판형 4*6 판
제본 양장
면수 248쪽
정가 12,000원↓
판매가 1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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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립금 600원(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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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 소개

 

이 책은 미국의 세계적 복음전도자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셋째 딸인 루스 그레이엄의 사부곡(思父曲)이다. 저자는 어려서부터 세계 곳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평범한 딸이 느껴야 했던 외로움과 가족들의 희생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버지, 빌리 그레이엄의 고통을 따뜻한 시선으로 전하고 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자신이 감당해야 했던 엄청난 사역의 부담으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들의 곁을 지킬 수 없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희생이었다. 빌리 그레이엄의 사역이 화려하게 피어날수록 가족들의 그림자는 더욱 깊어졌다. 저자 역시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성장기에 많은 외로움을 느꼈으며 그것은 곧 저자의 정서적 약점이 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자신의 상처보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바쁘고 어려운 과정 가운데서도 아버지 빌리 그레이엄이 보여주었던 사랑에 주목한다. 그는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 동안 하나님과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였으며, 자신이 감당치 못할 일은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 드렸다. 때로 그것은 사역이기도 했고, 사랑하는 가족일 때도 있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기도 했다.

또한 저자는 자신이 실패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귀향했을 때, 상처입은 딸을 향해 ‘어서 오너라’ 하고 팔 벌려 맞아주신 아버지를 통해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을 배웠노라고 고백한다. 저자의 고백은 계속 이어져 빌리 그레이엄의 사역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또 얼마나 신실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빌리 그레이엄과 그의 동역자들의 마지막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저자는 그들이 전 인생을 바쳐 사랑하는 이들에게 주고자 한 것이 바로 ‘믿음의 유산’이었다고 전한다.

이 책에는 아버지로서만이 아니라 사역자로서의 빌리 그레이엄의 모습도 잘 그려져 있다. 역동적인 복음전도자로서 한 시대를 섬겼던 그의 영적 발자취는 한국 교회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1973년 빌리 그레이엄이 방한하여 여의도에서 가졌던 한국전도대회 집회는 한국 교회 대부흥의 견인차가 되었다. 그는 한국 교회 복음주의 운동의 지원자였을 뿐 아니라 북한을 위한 중보자이기도 하다. 빌리 그레이엄은 1992년과 1994년에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면담을 하였으며, 현재도 빌리 그레이엄 전도협회에서 북한을 위한 사업을 계속해오고 있다.

이제 현역에서 은퇴했지만 그는 오늘도 여전히 복음을 전하는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소명을 다하고 있다. 저자가 보는 아버지, 빌리 그레이엄의 뒷모습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디모데후서 4:7-8)

 


 

 

▶ 한국어판 저자서문 

 

나는 열두 살 때 조부모님을 따라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외할아버지는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부의 수장이셨지요. 우리는 선교사가 파송된 지역들을 두루 다녔기에, 한국 곳곳을 구경하고 멋진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비행기에 몸을 싣고 점점 멀어지는 한국 땅을 보았을 때 내 마음은 슬펐습니다. 여러 헝겊들을 솜씨 있게 기운 것 같은 아름다운 땅을 보면서 나는 다시 한국에 돌아오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선교사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이모와 그 가족들은 한국에서 사십 년이 넘게 선교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 사촌은 지금도 한국에서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나와 한국과의 인연은 참으로 깊습니다. 1952년 크리스마스 무렵, 아버지는 부흥집회를 인도하시기 위해 한국에 계셨습니다. 험난한 전도여행이었지만, 궁핍한 전시에도 한국 사람들은 따뜻하고 친절하며 인정 많고 감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전도 집회에 찾아온 아이들을 애틋한 마음으로 대했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집에 두고 온 우리들을 그리워하셨는데, 그 아이들을 볼 때마다 위로와 기쁨을 얻었다고 하셨습니다. 

1973년 아버지는 한국을 다시 한 번 방문하셨습니다. 그 때 여의도 광장에서 가진 집회가 아마도 아버지 생애에 가장 큰 규모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한국 사람들에 대해 각별한 애정이 있으십니다. 한국 사람들이 보여준, 복음에 대한 목마름과 훈련된 삶에 대한 열망에 아버지는 깊은 감명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제 연로하셔서 거동이 불편하신 아버지는 한국에서 있었던 집회와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에 관해 자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늘도 한국 교회에서 전해지는 놀라운 소식들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 빌리 그레이엄, 그는 누구인가?

 


세계 복음주의의 한 획은 그은 영적 지도자. 1918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샬롯 태생으로 16세에 회심하고 플로리다 신학교와 위튼 칼리지를 졸업한 후, 1939년 목사가 되었다. 1949년 첫 번째 집회 이래, 빌리 그레이엄은 기독교 복음주의의 독보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통에 무디와 빌리 선데이 등의 천막집회(Canvas Cathedral)의 극적인 요소를 받아들여 열정적이면서도 복음적인 설교와 감동적인 예배를 드렸다. 순회전도 목사로 출발했지만, 구원에 대한 빌리 그레이엄의 단순한 메시지는 사람들로부터 열렬히 환영받았다.

70년대 후반에 이르자 그의 설교를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게 된 이는 1억 명에 이르게 된다. 그는 세계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전도한 위대한 부흥사였다. 또한 그는 탁월한 조직가로서 빌리 그레이엄 전도협회를 구성하여 전 세계를 무대로 집회를 열었으며 언론 매체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1990년 열린 홍콩집회는 전 세계에 중계되었고 1억 명의 사람들이 지켜보았다.

빌리 그레이엄은 미국 대통령들의 조언자이자 영적 지도자였으며 영향력 있는 인사들과의 교제가 깊었지만, 청렴함을 지키며 목사로서 자신의 소임을 잊지 않았다. 그는 2차 세계대전과 냉전이라는 엄청난 비극으로 인해 영적 불안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강하게 선포함으로써 교회를 위기에서 일으켜 세웠다. 냉전 시기에는 공산권에서 집회를 열어 동서 대화에 기여하였으며 타종교나 다양한 문화권에 대해서도 열린 자세로 접근하여 소통하였다. 또한 교회의 사회적 역할에도 관심을 기울여 다양한 자선사업을 벌였다. 덕분에 빌리 그레이엄은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개신교 지도자이자 사회사업가로서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그늘은 있었다. 빌리 그레이엄의 보수적인 성향은 진보진영으로부터 비판과 저항을 받았으며,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원칙적으로 정치와 종교를 통합하는 것에는 강하게 반발하였으며 언제나 종교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90년대 들어서 빌리 그레이엄은 이전의 보수적 입장에서 한발 물러나는 한편 인도주의적 활동에 집중했다. 일선에서 은퇴한 후에도 그가 세운 빌리 그레이엄 전도협회는 다양한 기독교 전도운동과 사회사업을 통해 그의 뜻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현재 92세의 고령으로 파킨슨병과 싸우고 있지만, 아직도 전 세계 복음주의 진영의 거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목차

 

 

▶ 소개

 

이 책은 미국의 세계적 복음전도자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셋째 딸인 루스 그레이엄의 사부곡(思父曲)이다. 저자는 어려서부터 세계 곳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평범한 딸이 느껴야 했던 외로움과 가족들의 희생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버지, 빌리 그레이엄의 고통을 따뜻한 시선으로 전하고 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자신이 감당해야 했던 엄청난 사역의 부담으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들의 곁을 지킬 수 없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희생이었다. 빌리 그레이엄의 사역이 화려하게 피어날수록 가족들의 그림자는 더욱 깊어졌다. 저자 역시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성장기에 많은 외로움을 느꼈으며 그것은 곧 저자의 정서적 약점이 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자신의 상처보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바쁘고 어려운 과정 가운데서도 아버지 빌리 그레이엄이 보여주었던 사랑에 주목한다. 그는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 동안 하나님과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였으며, 자신이 감당치 못할 일은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 드렸다. 때로 그것은 사역이기도 했고, 사랑하는 가족일 때도 있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기도 했다.

또한 저자는 자신이 실패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귀향했을 때, 상처입은 딸을 향해 ‘어서 오너라’ 하고 팔 벌려 맞아주신 아버지를 통해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을 배웠노라고 고백한다. 저자의 고백은 계속 이어져 빌리 그레이엄의 사역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또 얼마나 신실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빌리 그레이엄과 그의 동역자들의 마지막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저자는 그들이 전 인생을 바쳐 사랑하는 이들에게 주고자 한 것이 바로 ‘믿음의 유산’이었다고 전한다.

이 책에는 아버지로서만이 아니라 사역자로서의 빌리 그레이엄의 모습도 잘 그려져 있다. 역동적인 복음전도자로서 한 시대를 섬겼던 그의 영적 발자취는 한국 교회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1973년 빌리 그레이엄이 방한하여 여의도에서 가졌던 한국전도대회 집회는 한국 교회 대부흥의 견인차가 되었다. 그는 한국 교회 복음주의 운동의 지원자였을 뿐 아니라 북한을 위한 중보자이기도 하다. 빌리 그레이엄은 1992년과 1994년에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면담을 하였으며, 현재도 빌리 그레이엄 전도협회에서 북한을 위한 사업을 계속해오고 있다.

이제 현역에서 은퇴했지만 그는 오늘도 여전히 복음을 전하는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소명을 다하고 있다. 저자가 보는 아버지, 빌리 그레이엄의 뒷모습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디모데후서 4:7-8)

 


 

 

▶ 한국어판 저자서문 

 

나는 열두 살 때 조부모님을 따라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외할아버지는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부의 수장이셨지요. 우리는 선교사가 파송된 지역들을 두루 다녔기에, 한국 곳곳을 구경하고 멋진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비행기에 몸을 싣고 점점 멀어지는 한국 땅을 보았을 때 내 마음은 슬펐습니다. 여러 헝겊들을 솜씨 있게 기운 것 같은 아름다운 땅을 보면서 나는 다시 한국에 돌아오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선교사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이모와 그 가족들은 한국에서 사십 년이 넘게 선교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 사촌은 지금도 한국에서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나와 한국과의 인연은 참으로 깊습니다. 1952년 크리스마스 무렵, 아버지는 부흥집회를 인도하시기 위해 한국에 계셨습니다. 험난한 전도여행이었지만, 궁핍한 전시에도 한국 사람들은 따뜻하고 친절하며 인정 많고 감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전도 집회에 찾아온 아이들을 애틋한 마음으로 대했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집에 두고 온 우리들을 그리워하셨는데, 그 아이들을 볼 때마다 위로와 기쁨을 얻었다고 하셨습니다. 

1973년 아버지는 한국을 다시 한 번 방문하셨습니다. 그 때 여의도 광장에서 가진 집회가 아마도 아버지 생애에 가장 큰 규모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한국 사람들에 대해 각별한 애정이 있으십니다. 한국 사람들이 보여준, 복음에 대한 목마름과 훈련된 삶에 대한 열망에 아버지는 깊은 감명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제 연로하셔서 거동이 불편하신 아버지는 한국에서 있었던 집회와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에 관해 자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늘도 한국 교회에서 전해지는 놀라운 소식들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 빌리 그레이엄, 그는 누구인가?

 


세계 복음주의의 한 획은 그은 영적 지도자. 1918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샬롯 태생으로 16세에 회심하고 플로리다 신학교와 위튼 칼리지를 졸업한 후, 1939년 목사가 되었다. 1949년 첫 번째 집회 이래, 빌리 그레이엄은 기독교 복음주의의 독보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통에 무디와 빌리 선데이 등의 천막집회(Canvas Cathedral)의 극적인 요소를 받아들여 열정적이면서도 복음적인 설교와 감동적인 예배를 드렸다. 순회전도 목사로 출발했지만, 구원에 대한 빌리 그레이엄의 단순한 메시지는 사람들로부터 열렬히 환영받았다.

70년대 후반에 이르자 그의 설교를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게 된 이는 1억 명에 이르게 된다. 그는 세계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전도한 위대한 부흥사였다. 또한 그는 탁월한 조직가로서 빌리 그레이엄 전도협회를 구성하여 전 세계를 무대로 집회를 열었으며 언론 매체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1990년 열린 홍콩집회는 전 세계에 중계되었고 1억 명의 사람들이 지켜보았다.

빌리 그레이엄은 미국 대통령들의 조언자이자 영적 지도자였으며 영향력 있는 인사들과의 교제가 깊었지만, 청렴함을 지키며 목사로서 자신의 소임을 잊지 않았다. 그는 2차 세계대전과 냉전이라는 엄청난 비극으로 인해 영적 불안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강하게 선포함으로써 교회를 위기에서 일으켜 세웠다. 냉전 시기에는 공산권에서 집회를 열어 동서 대화에 기여하였으며 타종교나 다양한 문화권에 대해서도 열린 자세로 접근하여 소통하였다. 또한 교회의 사회적 역할에도 관심을 기울여 다양한 자선사업을 벌였다. 덕분에 빌리 그레이엄은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개신교 지도자이자 사회사업가로서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그늘은 있었다. 빌리 그레이엄의 보수적인 성향은 진보진영으로부터 비판과 저항을 받았으며,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원칙적으로 정치와 종교를 통합하는 것에는 강하게 반발하였으며 언제나 종교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90년대 들어서 빌리 그레이엄은 이전의 보수적 입장에서 한발 물러나는 한편 인도주의적 활동에 집중했다. 일선에서 은퇴한 후에도 그가 세운 빌리 그레이엄 전도협회는 다양한 기독교 전도운동과 사회사업을 통해 그의 뜻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현재 92세의 고령으로 파킨슨병과 싸우고 있지만, 아직도 전 세계 복음주의 진영의 거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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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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